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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커버스토리| 아티스트 권지안미운 오리 솔비, 날다

사람들은 놀렸다. 왜 그렇게 이상한 생각을 하고, 왜 그렇게 이상한 질문을 하느냐고. 그는 어딜 가나 ‘튀는’ 존재였다. ‘사차원’ ‘별종’이라는 수식어가 익숙했다. 가수 솔비. 그는 아팠다. 쏟아지는 악플조차 관심으로 받아들이며 견딘 시간은 단단한 응어리를 만들었다. 우울증이 깊었다. 그즈음 치유를 위해 만난 미술은 그에게 구원이 됐다. 그리고 간절한 두 번째 꿈이 생겼다.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상처를 꺼내 자신만의 이야기를 녹여내기 시작했다. 트라우마였던 튀는 생각과 발상은 오히려 표현력에 날개를 달아줬다. 노래하는 화가 권지안. 훨훨 날아오른 그는 이제 블루칩 작가 중 한 명으로 우뚝 섰다.


 


2017년, 솔비가 〈뮤직뱅크〉에서 선보인 강력한 퍼포먼스를 잊지 못한다. 무대를 캔버스 삼아, 자신의 몸을 붓 삼아 그는 그림을 그렸다. 온몸에 시뻘건 물감을 뒤집어쓰고 토해내는 절규는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방송 이후 호평과 혹평으로 의견이 분분했다. 그는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남겼다.


“사회에서 튀는 존재를 다수의 사람들은 불편해한다. 낯설기 때문이다. (중략) 세상은 소수의 의견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혁신은 그들의 헌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잣대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교만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고 일관성 있게 해온 그에게는 이제 혹평보다 호평이 더 많이 쏟아진다. 그의 작품의 가치는 고공 행진 중이다. 세계적인 아트페스티벌 〈2019 라 뉘 블랑쉬 파리〉 초청 작가에 선정되는가 하면, 경매와 아트페어 때마다 작품 최고가를 경신한다. 지난 10월에 열린 〈키아프(KIAF)〉에서도 최고가(2300만 원)를 찍으면서 전시가 오픈되기도 전에 여섯 점이 완판됐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새삼 놀란 점이 많다. 그는 다양한 영역에서 쉬지 않고 창조적 발상을 구현해온 예술가였다. 가수 솔비로 활동할 때는 무대마다 색다른 의상과 콘셉트로 개성을 뽐냈고, 2014년에 쓴 에세이 《누가 뭐라고 해도 나답게》에서는 ‘나다움’이라는 트렌드를 앞서 읽고 실천했다. 언어 감각도 탁월하다. 우리는 권지안이라는 예술가를, 만들어진 가수 솔비의 이미지에 가두고 평가절하한 건 아닐까.


초겨울, 그가 입주해 있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 가나아틀리에에서 마주 앉았다. 의상 콘셉트에 따라 그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풍겼다. 베이지 숄을 걸쳤을 땐 신화 속 주인공처럼 우아하더니, 보라색 정장을 입자 패션지의 도도한 에디터 느낌이 났다. 만나자마자 그는 “제가 눈이 너무 많이 부었지요. 아까 나태주 선생님이 다녀가셨는데, 그때 너무 많이 울어서 그래요”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태주 선생님과 원래 친분이 있었어요?


“아니요. 오늘 처음 뵈었어요. 나태주 선생님이 저를 만나고 싶다면서 먼저 연락을 주셨대요. 제 행보를 보면서 궁금하셨나 봐요. 작품도 보시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겠다는, 용기를 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오랜만에 어른을 만난 것 같았어요. 제 작품을 보고 충격받았다고 표현해주셔서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어른이 알아주신 느낌이에요.”



좋은 말씀을 들었는데 왜 울었을까요.

감동해서?


“그것도 있고요, 아빠 생각이 너무 많이 나서요. 6개월 전에 돌아가신 아빠와 시인님이 두 살 차이시더라고요. 아빠를 생각하면서 작업한 저 〈허밍〉 시리즈를 보고 시인님이 ‘하늘 글자’라고 하셨어요.”



하늘 글자라….


“시인님의 표현이 너무 근사하죠? 아빠가 돌아가신 후 노래 가사를 쓰려 했는데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거예요. 뮤지션 친구와 대화하다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허밍처럼 흘러나왔죠. 허밍이 그림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발상으로 작업을 했는데, 그걸 시인님이 정확하게 보시고 이런 시를 즉석에서 써주셨어요.”



그는 〈허밍〉 옆에 있는 ‘피스오브호프(Piece of Hope)’ 시리즈의 빨간색 삼각형 작품을 떼어 오더니 뒷면을 보여줬다. 나태주 시인이 직접 연필로 한 자 한 자 써준 즉흥시였다.


“하늘 글씨/ 솔비 작가님/ 말로써 할 수 없는 말/ 글자로도 다 할 수 없는 말/ 마음의 글씨로 보여 드려요/ 그 나라에서 잘 계시지요?/ 나도 여기 잘 있어요.”


마치 부녀로 빙의해서 〈허밍〉의 내용을 해석한 듯한 메시지. 이를 받아 들고 권지안은 한참 울었다고 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는 이에 대한 답가로 작품 옆에 나란히 있던 흰색 페어 작품 뒷면에 이렇게 적어서 시인에게 선물했다.


“지우다 지우다 만 마지막 말/ 아빠를 만난 것 같다/ 사랑해.”



이 공간에 있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네. ‘피스오브호프’ 시리즈예요. 시작은 작년 12월부터죠. 혹시 기억하세요? 제가 만든 케이크가 표절 논란에 휩싸였던 거. 매년 제가 찾아가는 보육원이 있는데 작년엔 코로나 때문에 만나러 갈 수 없었어요.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던 차에 빵집 쇼케이스에 있는 케이크를 보게 됐죠. 하나같이 정형화돼 있고 매끈하잖아요. ‘왜 케이크는 다 똑같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나만의 케이크를 만들고 싶었어요. 조카가 색 클레이를 가지고 노는 걸 보면서 저 느낌의 어글리 케이크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죠. 그게 그렇게 왜곡되어 해석될지 몰랐어요.”



제프 쿤스에 대한 오마주라고 답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만.


“저는 오마주라는 답변을 한 적이 없어요. 표절 아니면 오마주라고들 생각하는 것 같아요.”



속상했겠습니다.


“그렇죠. 좋은 일에 쓰고 싶었는데, 논란이 일면서 케이크의 기능을 잃어버렸어요. 욕을 많이 먹어서 버려진 저의 모습 같았어요. 차라리 해명하기보다 작가적 방식으로 대응해보자고 발상을 바꿨습니다. 저 케이크를 평면작업으로 해체하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고, 버려진 듯한 저의 모습이 현대인의 어떤 표상 같기도 해서 거기에 초를 넣어 희망을 주고 싶었어요. 초를 태우면서 미워했던 감정, 원망했던 감정이 다소 유화됐어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군요.

2017년 하이퍼리즘 퍼포먼스도 그렇고, 2014년 《누가 뭐라고 해도 나답게》 책도 그렇고, 시대를 앞서간다는 느낌을 받아요.

비난이 점점 호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늘 뭔가를 시작할 때는 외롭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럼에도 꼭 해야 한다는 실행력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실행력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확신을 가지고 해요.”



어떤 확신이죠?


“저의 느낌? 시대의 흐름에 민감한 편이기도 하고, 그런 콘텐츠를 많이 찾아보다 보니 알게 모르게 학습되는 부분도 있을 테고요. 지금 나의 고민이 너의 고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기본적으로 제 감정에 충실하고, 그 느낌에 대한 확신을 갖고 전달하려 합니다.”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은 없어요?


“없진 않아요.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안 받아들여져도 괜찮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이 안 받아들여도 내가 확신이 있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거라고 밀어붙였죠. 네 살 때부터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온 것도 그래요.”



가수는 불안정한 직업이라는 주위의 숱한 회유가 있었을 텐데요.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하는 성격이에요.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다니면서 했어요. 중학생 때는 연극 극단을 찾아가서 ‘저 여기에 들어오고 싶어요’ 하면서 청소부터 시작했어요. 차비가 없어서 카페 알바를 하면서요.”



부모님은 어떤 반응이었나요.


“엄마의 반대가 엄청 심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대학교 가는 정식 코스를 밟길 원하셨어요. 그 삶이 어쩌면 엄마의 꿈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내 인생의 플랜은 내가 짠다’는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어요. 일단 가수 꿈을 이루고 나중에 내가 돈 벌어서 대학을 가겠다고 했죠. 대학은 나의 꿈이 아니었으니까요. 결국 2006년에 데뷔하고, 2010년에 수능을 치러 대학을 갔어요. 28세에 대학 신입생이 됐죠.”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저를 많이 응원해주셨어요. 좋아하시는 걸 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으셨죠. 꽃 장사를 오래 해서 집에는 늘 장사하고 남은 꽃이 넘쳤어요. 한번은 아빠한테 여쭤봤어요. ‘사람들이 왜 자꾸만 나보고 바보라고 해?’ 했더니 아빠가 이렇게 대답해주셨어요. ‘바보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거야. 진짜 바보여서가 아니라,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니까.’”



아버지를 닮았군요.


“네. 그때 진짜 많은 용기를 얻었어요. 엄마 몰래 용돈도 쥐어주면서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고 말씀해주시고요(눈물).”



아이고, 오늘 눈물이 많은 날이네요.

그래서 아버지의 부재가 더욱 컸겠습니다.


“오늘 제가 감성이 터지는 날이네요. 내 편이 없어진 느낌이에요. 요즘 아빠가 유독 많이 생각나요. 돌아가신 직후보다 빈자리가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진짜 잊히는 것 같아서 더 슬퍼요. 처음에는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고 위로했는데, 이제는 진짜 아닌 것 같아서.”



인터뷰 준비를 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어떻게 하면 이렇게 나다움으로 똘똘 뭉친 삶을 살 수 있을까, 였어요.

지금 보니 아버지가 주신 선물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느껴요. 아빠가 영향을 많이 끼쳤구나, 생각이 들어요.”



나답게 사는 삶과 사회적 성공, 이 둘이 충돌할 때는 없어요?


“용기를 내서 나다운 삶을 추구해도 인정받지 못하고 계속 외롭다면 못 버틸 거예요. 그래서 저는 나를 위한 보상이 있어야 해요. 부(富)가 될 수도, 사람들의 힘이 되는 한마디가 될 수도 있겠지요. 결국은 사람에게서 답을 찾곤 했어요.”



안 그래도 궁금했어요. 소속사인 엠에이피크루 직원들과 협업 공동체 같더군요. 권지안 씨에 대한 이정권 대표의 팬심도 상당하고요.


“대표님과 함께 일한 지 7년 됐어요. 2013년 문화인들의 모임에서 대표님을 처음 뵈었는데요, 그때 대표님은 가나아트 총괄기획이었고, 저는 미술에 막 빠진 상태였어요. 대표님을 따라다니면서 계속 물었죠. ‘그림을 잘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고. 8개월 넘게 괴롭혔어요(웃음). 어느 날 대표님이 정색하고 물으시더라고요. 3년 동안 방송 출연 안 하고 그림만 그릴 수 있겠느냐고요. 저는 망설임 없이 ‘네, 할 수 있어요’ 했어요. 대표님이 ‘진짜요?’ 되묻더니 숙제를 내주셨어요. 그림과 삶이 일치하는 그림을 그려보라고요.”



그래서 대표님과 3년 약속은 지켰나요?


“네. 거의요. 방송을 거의 안 하고 작품에만 몰입했는데, 그 느낌이 정말 묘했어요. 미술을 통해 제 삶이 부활한 느낌이랄까요.”



부활이요? 그림 그리는 마음이 어땠길래.


“방송에서는 편집된 저만 보여요. 무슨 말을 해도 딱 기존의 솔비 이미지로만 편집되곤 했죠. 그 모습에 상처를 많이 받아서 우울증이 생겼고, 그걸 치유하기 위해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림은 편집이 없어요. 제 마음을 캔버스에 솔직하게 쏟아부으면 모든 분들이 그걸 온전하게 볼 수 있더라고요. 말과 글이 아닌 감정으로 소통하는 느낌이 참 좋았어요. 그러면서 점점 우울증을 극복하게 됐죠.”



권지안이라는 본명으로 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군요.


“솔비는 텔레비전 화면 속의 편집된 캐릭터, 권지안은 그냥 저 자신이에요.”




무대 위의 솔비와 그림 그리는 권지안.

두 페르소나는 어떻게 다른가요.


“가수로서 노래하는 저는 만들어진 제가 많아요. 연습하고 훈련한 걸 하니까 내면의 것을 꺼내기는 쉽지 않잖아요. 그림 그리는 저는 완전히 저예요. 벌거벗은 나 자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보여주는 느낌은 처음이었어요. 카타르시스가 컸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미술의 영향이 선했어요. 누구나 치열하게 살면서 늘 경쟁해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좀 더 약고, 강해야 하잖아요. 착하면 손해 보고. 저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다가 받은 상처가 너무 많아서 착하게 살면 안 돼, 우습게 보이면 안 돼, 하는 생각으로만 살아왔어요. 그런데 미술은 정반대 이야기를 했어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줘도 괜찮아, 착해도 괜찮아, 선해도 괜찮아, 라는.”



권지안 씨 착해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전 되게 착해요(일동 웃음). 마음이 되게 편한 사람이에요. 모르면 모른다고,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다고 하는.”



그런 미술의 순기능이 다른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때도 느껴지나요.


“미술사를 공부하고, 작가들의 삶을 접하면서 삶이 제각각 귀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가장 용기가 된 말은 모두 평범하게 살지 않았다는 것. 좀 유별나도 괜찮아, 라는 용기를 많이 얻었어요.”



누구나 천재로 태어나지만, 어른이 되어가면서 천재성을 잃곤 하죠.

권지안 씨는 그걸 지켜낸 것 같아 박수 쳐주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말하는 게 무서웠어요. 무슨 말만 하면 평범하지 않다고 놀렸거든요. 저는 궁금했어요. ‘대체 평범함이라는 게 뭘까?’ 궁금하고 답답하고 힘들었어요. 그런데 미술작가들을 접하다 보니 평범한 사람이 없는 거예요.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라는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한편으로는 내가 있을 곳은 여기네, 하는 편안함도 느꼈고요. 유별나다는 건 더 이상 트라우마가 아니라 굉장히 좋은 장점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다름을 인정하게 됐고, 다름을 인정하다 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매사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세상의 온도가 더 따듯하게 느껴지겠군요.


“우리는 사실 다 다르잖아요.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서 분란이 생기고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게 되죠.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건 타인에 대한 시선뿐 아니라, 나 자신일 수도 있어요. 저는 미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어요. 각자의 생각은 제각각 귀하다고 생각해요.”



지인들은 지안 씨한테 찾아온 변화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반응이 다 달라요. 어떤 친구는 ‘편안해 보여, 행복해 보여’ 하고, 또 어떤 친구는 ‘너 되게 이상해졌어, 갑자기 왜 그래?’ 해요. 또 어떤 친구는 ‘왜 갑자기 이미지 세탁?’ 해요. 이런 시각들이 틀렸다고 보지 않아요. 다 각자의 생각이니까.”



인터뷰하면서 여러 가지 페르소나가 느껴져요.

겁쟁이와 용감무쌍함, 소심쟁이와 당당함, 게으름과 부지런함, 커리어우먼과 똘끼 충만한 예술가 등 극과 극의 성정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감당이 안 될 때도 있어요. 누군가가 그랬어요. 대개는 다양한 페르소나 중 두드러진 하나가 있는데, 저는 다 크대요. 가끔은 내가 누구지? 하고 혼란스러워요.”



그 혼란이 예술의 추동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걸 인정했어요. 내 안에 다양한 내가 있다는 것. 그때그때 꺼내고 싶은 자아를 꺼내고, 나오고 싶은 자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시작했죠. ‘오늘은 네가 나오고 싶었구나?’ 하면서. 언행불일치라는 말도 많이 들어요(웃음).”



매 순간 머물러 있지 않는 건, 창의력이 충만한 사람의 특질이기도 해요.


“어떤 글에서 ‘일관되고 반복적인 건 기적이다’라는 구절을 읽었어요. 완전 공감해요. 어떻게 매일 똑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한때는 커리어우먼이 로망이었어요. 그래서 일이 없을 때 커리어우먼의 시간표대로 짜고 그대로 지킨 적이 있었어요. 아침 7시 30분에 기상해서 물 마시고 밥 먹고 운동해요. 그리고 씻고 서점에 가서 두 시간 정도 머물죠. 그때 책을 엄청 많이 샀어요. 두 시부터 다섯 시까지는 뭔가를 배우는 시간이에요. 피아노, 드럼, 양초 만들기, 케이크, 그림, 꽃꽂이, 기타, 연기 등. 여섯 시에 정규 일과가 끝나고 밤에는 글을 끄적이다가 잤어요. 이런 루틴을 1년간 빠짐없이 지켰어요.”



세상에, 하기 싫거나 게으름 피우고 싶진 않았어요?


“저와의 약속이 더 중요했거든요. 스스로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셀프 컬래버레이션을 6개월간 매일 연습하면서도 그랬어요. 너무 아프고 힘들었거든요. 현관을 나가면서 거울을 보며 말했어요. ‘할 수 있어, 넌 할 수 있어’ 하고요. 그 반복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작품 활동을 해온 10년 동안 변화가 느껴집니다.

초창기 그림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라면, 근작일수록 추상적이에요.


“과거에는 ‘나 이런 마음이야. 알아주면 좋겠어’ 하는 심정이었어요. 초반의 욕망에 대한 작업은 오랫동안 묵혀둔 감정이었죠. 일기 같았어요. 그 후 하이퍼시리즈, 셀프 컬래버 작업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응어리를 꺼내는 일이었고요. 레드 작업을 하고 6개월간 정말 힘들었어요. 온몸의 기가 다 빠져나간 느낌이고 가위도 많이 눌렸어요. 엄청난 덩어리가 내 안에서 쑥 빠져나간 것 같은. 출산하면 이런 느낌일까요?”



응어리의 결정체는 뭔가요?


“상처죠. 유별나서 받은 상처들. 가수가 된 후 인터넷으로 욕도 많이 먹고 인신공격성 댓글도 받았어요. 버려진 느낌이 들었죠. 그런데 나를 돌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잘 보일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하나의 꿈만 꿔온 부작용 같아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다 보니 사람들이 던지는 돌을 맞아도 그게 관심인 줄 알았어요. 왜 나는 부족할까, 이상할까, 이런 마음이 저를 갈기갈기 상처 냈어요.”



하이퍼리즘 후 해소되는 느낌이 들던가요?


“당시에는 몰랐는데, 1년 후 보니 엄청 강해져 있더라고요.”



강해졌다는 건?


“제 목소리가 먼저 들려요.”



용기라는 말을 많이 쓰는 거 알아요?


“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에요.”



반대로 두려움이라는 말도 많이 쓰는데요.


“그 또한 제가 많이 쓰는 말이에요. 두려움과 용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어요. 그래서 이순신 장군도 이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그 용기는 백 배, 천 배로 증폭될 것이다’라고요. 저는 용기를 주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요. 사실 버티는 삶을 산다고 생각해요. 스토리가 공개되는 삶을 살다 보니 늘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여기에서 포기하지 말자, 내가 먼저 용기를 내고, 그 용기를 작품을 통해 전해주자는 생각을 많이 해요.”



천재는 홀로 완성되지 않는다. 천재를 알아봐주는 사회가 있어야 가능하다. 화가 권지안은 천재적일까? 아무도 단정할 순 없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편견 없는 시선이다. 재미를 위해 편집된 솔비라는 틀을 벗어나 그의 말과 작품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시선. 이건 비단 권지안뿐 아니라 수많은 잠재적 천재들을 발굴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태도 아닐까.


출처: 톱클래스

http://topclass.chosun.com/board/view.asp?catecode=I&tnu=202112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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